쉬운 말이 가장 깊은 말이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다시 보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진짜 이유는 글자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글자는 있었다. 한자가 있었다. 다만 그 한자는 양반의 것이었지, 백성의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양반에게 한문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지위를 증명하는 표식이었고, 백성과 자신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한문을 안다는 것이 곧 권력이었다. 그래서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 사대부들이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했다. 명분은 사대(事大)였지만, 그 밑바닥에는 자신들이 독점하던 지식의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지금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한자의 자리를 영어가 차지했고, 거기에 경제학·경영학·심리학 용어가 더해졌다. 회의실에서, 강연장에서, 일상 대화에서조차 사람들은 외래어와 전문 용어를 일부러 섞어 쓴다. 그것이 자신을 능력 있어 보이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나는 오랫동안 그런 자리에서 위축되곤 했다. 누군가 '결자해지'나 '타산지석' 같은 말을 던지면 그 뜻을 떠올리느라 다음 말을 놓쳤다. '프로파간다'나 '페르소나' 같은 단어가 나오면 어떤 의미로 쓴 것인지 헷갈려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늘 듣는 내 몫이었다. 못 알아들은 내가 무식해서, 공부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정말 깊이 있는 사람들은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을 다시 들어보면, 영토 대신 땅이라 했고 식사 대신 밥이라 했으며 치하 대신 칭찬이라 했다. 단어는 흙처럼 평범한데 그 안에 담긴 사유는 단단했다. 반면 외래어와 전문 용어를 쏟아내는 사람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화려한 단어의 나열일 뿐 알맹이는 빈약한 경우가 많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못 알아들은 내가 아니라, 상대가 알아들을지 가늠하지 않고 단어를 던진 그 사람이었다. 말은 본래 듣는 사람에게 닿아야 완성된다. 닿지 않은 말은 말한 사람의 책임이지, 듣는 사람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안다. 90대 노인과 대화할 때, 10살 아이와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단어를 고른다. 그런데 같은 성인을 대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건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를 배려할 동기가 있느냐의 문제다. 알아서 따라오라는 태도를 같은 성인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일종의 차별이다. 어른이라고 해서 모든 분야의 모든 용어를 알아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물론 모든 전문 용어 사용이 과시는 아니다. 정확한 개념이 그 단어에만 담겨 있어 다른 말로 옮기면 의미가 흐려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핵심은 단어의 난이도가 아니라 태도다. 듣는 사람을 구분하는 좋은 기준이 하나 있다. 이 사람은 단어를 도구로 쓰고 있는가, 단어가 이 사람을 끌고 가고 있는가. 도구로 쓰는 사람은 어려운 용어를 쓰면서도 잠깐 멈추고 풀어 설명하거나 듣는 사람의 표정을 살핀다. 끌려가는 사람은 단어를 던지고 지나간다. 듣는 사람이 따라오는지 확인할 여유가 없다. 자기 자신이 그 단어의 무게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알맹이가 부족하다.
진짜 고수는 다르다. 동료들과는 정밀한 전문 용어로 깊이 토론하다가도, 일반인을 만나면 비유와 일상어로 풀어준다. 상대에 따라 언어의 높낮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한다. 이것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다. 인지적 유연성이고 사회적 성숙이며, 무엇보다 자기가 아는 것을 진짜로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는 증거다. 어떤 개념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은, 그 개념을 책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다시 빚어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려운 단어 뒤에 숨는 사람은 대개 그 개념의 껍데기만 안다. 단어를 빼면 설명할 수 없으니 단어에 매달린다.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자기 위치에 대한 불안이 클수록 어휘로 거리를 만들려 한다. 얄밉게 느껴지는 그 행동이 사실은 그 사람의 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됐지만, 의식적으로 어려운 단어를 쓰지 않는다. 오히려 더 쉽게 풀어서 말한다. 내가 그 자리에서 느꼈던 위축감을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당했던 것을 그대로 갚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 흐름을 내 선에서 끊고 싶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묻는 일이 부끄럽지 않은 사회를 꿈꾼다. "그 단어는 어떤 의미로 쓰신 거예요?"라고 묻는 것이 무지의 표시가 아니라, 정확히 이해하고 싶다는 적극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사실 가장 활발한 학문 공동체에서는 이미 그렇게 한다.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도 세미나에서 거리낌 없이 "그게 무슨 뜻이죠?"라고 묻는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가장 빨리 배우고,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마음이 바로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훈민정음 서문의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문장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다. 그것은 소통 실패의 책임을 지배층이 진다는 선언이었다. 백성이 못 알아듣는 것은 백성의 무지가 아니라 글자를 만든 우리의 문제라는 발상의 전환. 그 시대로서는 거의 혁명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오늘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할 때, 나는 내 입에서 나가는 단어 하나하나를 의식할 것이다. 이 단어가 상대에게 닿을지, 아니면 그 사람을 위축시킬지. 닿지 않을 것 같으면 다른 말로 바꿀 것이다. 그것이 거창한 신념의 실천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상대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는 가장 작은 방식이기 때문이다.
쉬운 말이 가장 깊은 말이다. 명료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명료하게 말한다. 자기 생각이 흐릿한 사람일수록 어려운 말 뒤에 숨는다. 세종이 우리에게 물려준 진짜 유산은 한글이라는 글자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 상대가 닿을 수 있는 자리까지 내가 내려가려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시대에 다시 살려내야 할 가장 오래된 정신일 것이다.